주시애틀총영사관과 시애틀 오페라가 공동 주최한 제4회 ‘카르멘과 함께하는 한국인의 밤(Korean Night at Carmen)’이 지난 5월 9일 시애틀 맥카우 홀(McCaw Hall)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본 공연인 비제 오페라 ‘카르멘’ 시작에 앞서 오후 6시 맥카우 홀 3층 노드클리프 룸(NordCliff Room)에서 열린 프리쇼에는 한인 관객과 귀빈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행사 진행과 강연, 한국 가곡 미니 콘서트는 시애틀 오페라의 한국계 주연 소프라노 이연지가 도맡았다. 한국어로 진행된 강연에 대비해 주최 측은 실시간 통역과 인공지능(AI) 회의록 앱 비즈크러시(Bizcrush)의 큐알(QR) 코드를 별도로 제공해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관객도 휴대폰을 이용해 영어 자막으로 강연을 따라갈 수 있게 했다. 비즈크러시 측에서 직접 사용법을 안내했다.
이연지 소프라노는 이날 강연 주제를 ‘자유가 어떻게 노래가 되는가(How freedom becomes a song)’로 잡았다. 이 소프라노는 자신을 “2017년 시애틀 오페라에서 주연으로 데뷔한 첫 한국 여성 가수”라고 소개한 뒤, 이후 앵커리지·버지니아·아이다호 오페라단을 잇따라 거친 경력과 파리 퐁피두 센터·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진행한 설치 미술 협업,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 한국 초연 등을 차례로 소개했다.
본격 강연에서는 비제(Bizet)의 음악적 위치를 짚었다. 이 소프라노는 “비제 이전의 오페라가 왕실과 귀족을 위한 신화 중심의 작품이었다면, 비제의 오페라는 대중을 향해 열린 쇼핑몰 같은 작품”이라며 “오페라에서 음을 붙여 말하는 레치타티보 대신 일상 대화(spoken language)를 사용한 것이 비제가 만든 새로운 흐름이었고, 이것이 훗날 뮤지컬의 출발점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비제를 BTS 소속사를 이끄는 방시혁 의장에 비유한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이 소프라노는 “비제는 9살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하고 19살에 로마 대상을 받은 천재이지만, 그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대중이 따라 부를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며 “당대 히트곡 제조기였던 비제는 지금 시각으로 보면 150년 전의 케이팝페라 작곡가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대표곡 ‘하바네라(Habanera)’가 카르멘 역 메조소프라노에게 13번이나 퇴짜를 맞은 끝에 14번째 안에서야 채택됐다는 일화도 소개됐다.
이 소프라노는 또 “비제는 1875년 3월 3일 카르멘을 파리 오페라 코미크에서 초연한 직후 혹평을 받았고, 약 3개월 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며 “공연 4개월 뒤 빈에서 카르멘이 대박을 터뜨리고 브람스가 스무 번 넘게 관람할 정도로 사랑받았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또 같은 해 조선에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을 들어 “프랑스 파리와 조선이 각자 격변기를 통과하던 같은 시기, 카르멘은 자유롭게 살고자 한 인간의 이야기를 담아냈다”고 해석했다.
이번 시애틀 오페라 카르멘은 원작의 스페인 배경 대신 1950년대 피델 카스트로 혁명 직전의 쿠바 아바나를 무대로 옮긴 2019년 프로덕션을 다시 올린 작품이다. 이 소프라노는 “‘하바네라’의 어원이 된 그 아바나”라며 작품의 시대·공간 변경 의미를 짚었다.
축사에 나선 서은지 주시애틀 총영사는 시애틀 오페라 제임스 로빈슨(James Robinson) 총감독에게 감사의 뜻을 먼저 전했다. 서 총영사는 “처음 코리아데이를 시작할 때 독일 커뮤니티와 함께 출발했지만, 지난 4년 동안 시애틀 오페라와 함께 코리아데이를 이어온 커뮤니티는 한인 커뮤니티가 유일하다”며 “시애틀 오페라 측에서도 한인 사회의 문화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시즌에는 한국 성악가가 무대에 오르지 못해 아쉽지만, 앞으로 한국 오페라 가수들이 시애틀 오페라 무대에 설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전했다.
서 총영사는 또 로빈슨 총감독에게 케이팝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의 오페라 버전 제작을 요청해 긍정적인 답을 들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서 총영사는 이 자리에서 특별 게스트로 한국계 정치인 신디 류(Cindy Ryu) 워싱턴주 하원의원 겸 주 상원 출마자, 벨뷰 학군 학교운영위원 제인 아라스(Jane Aras), 머서아일랜드 시의원 줄리 시에(Julie Hsieh), 시애틀 차이니즈 챔버 오브 커머스(Chinese Chamber of Commerce) 릴리 해피티엔을 차례로 소개했다. 워싱턴주 한인상공회의소 은지연 이사장도 자리에 함께 했다
이어 마이크를 잡은 제임스 로빈슨 총감독은 “시애틀에 부임한 지 1년 8개월이 됐고,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 중 한 명이 한국 측 인사였다”며 “한국 음악과 한국 성악가, 한국 지휘자를 시애틀 오페라 무대에 더 많이 올리는 방안을 두고 총영사관과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로빈슨 총감독은 “이번 카르멘에는 오케스트라 피트에 시애틀 심포니 단원 65명, 무대 위 출연자 85명, 백스테이지 인력 30~40명이 함께한다”며 “팬데믹 이후 공연 예술단체가 어려운 시기를 겪었지만 시애틀 오페라는 현재 풀스테이지 오페라 3편과 세미스테이지 1편으로 운영하고 있고, 2년 안에 5편 체제로 다시 늘릴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배우 티모시 샬라메가 오페라와 발레를 폄하한 발언을 한 직후 ‘티모시(Timothy)’를 프로모션 코드로 적용해 14% 할인 캠페인을 벌여 티켓 판매가 급증하고 BBC 등 세계 언론에 보도된 사례도 함께 소개됐다.
이날 행사에서는 의사 출신으로 머서아일랜드 시의원이자 벨뷰 유안루(Yuan Ru) 갤러리 운영자인 줄리 시에의 즉석 무대가 깜짝 등장해 분위기를 한껏 달궜다. 시에 시의원은 늦은 도착에 대해 “오늘 다섯 번째 일정”이라며 양해를 구한 뒤 “어릴 때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는데 결국 가정의학과 의사가 됐고 지금은 미술 분야에 있다”며 “카르멘을 보러 가기 전에 약간의 퀴즈를 해보자”고 운을 띄웠다.
시에 시의원은 카르멘에 등장하는 대표 아리아의 첫 소절을 직접 부른 뒤 관객들에게 곡 제목을 맞히도록 했다. 두 곡 모두 카르멘 1막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메조소프라노 아리아였다. 이연지 소프라노는 “줄리 시에 시의원의 카르멘 데뷔작과 같은 곡이었고, 당시 프로덕션이 시애틀 오페라 역대 최고 매출을 기록했을 만큼 훌륭했다”고 시에 시의원의 무대 경력을 소개하며 박수를 보탰다. 이연지 소프라노는 시에 시의원의 무대를 두고 “기존의 클래식 정통 카르멘이었다면, 오늘 무대는 1950년대 아바나를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색깔의 카르멘이 될 것이라 더욱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이연지 소프라노는 이어 직접 큐레이팅한 한국 가곡 미니 콘서트로 무대를 이어갔다. 시애틀 오페라 측은 미국·유럽 메이저 오페라 극장을 통틀어 전곡 한국어 가곡 프로그램이 무대에 오른 것은 이번이 세계 최초라고 밝혔다. 이 소프라노는 한국 현대 가곡 두 곡과 자작곡, 그리고 한국 정통 가곡 한 곡으로 무대를 구성했다.
자작곡 ‘Enough’는 시애틀 오페라 한국인의 밤을 준비하던 어느 밤, 변덕스러운 시애틀 날씨 속에서도 자신의 때에 맞춰 피어나는 벚꽃에서 영감을 얻어 쓴 곡이라고 소개됐다. 이 소프라노는 “어떤 경험을 거쳤든 그 자체로 한 그루의 꽃나무로 서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며 “이 곡은 6월 정규 디지털 싱글로 발매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마지막 무대는 한국 정통 가곡 ‘그리운 금강산’이었다. 이 소프라노는 “남으로 내려온 실향민이 더 이상 금강산에 갈 수 없게 된 그리움, 그리고 만날 수 없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곡”이라고 설명한 뒤 프리쇼 무대를 마무리했다.
프리쇼가 끝난 뒤 오후 7시 30분 맥카우 홀 본 무대에서는 시애틀 오페라의 2025~2026 시즌 마지막 작품인 비제의 ‘카르멘’ 본 공연이 약 3시간 30분에 걸쳐 펼쳐졌다. 카르멘 역에는 타코마 출신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한 세계적 메조소프라노 제이나이 브리지스(J’Nai Bridges)가 무대에 올랐고, 지휘는 시애틀 심포니 명예 지휘자 루도빅 모를로(Ludovic Morlot)가 맡았다. 시애틀 심포니 단원 56명과 40인조 시애틀 오페라 합창단이 함께한 이번 공연은 두 차례 인터미션을 두고 진행됐으며, 프랑스어 원어 공연에는 영어 자막이 제공됐다.
이연지 소프라노가 강연에서 짚었던 1950년대 아바나의 풍경은 무대 위에서 그대로 살아났다. 원작의 스페인 정취를 쿠바 혁명 직전의 카리브해 도시로 옮긴 연출 속에서 ‘하바네라’와 ‘투우사의 노래’, ‘꽃의 노래’ 같은 익숙한 선율이 새로운 색채로 흘러나왔고, 객석은 공연 내내 박수와 환호로 화답했다. 카르멘 본 공연은 5월 17일까지 맥카우 홀에서 이어진다.
[사진=김승규기자]
출처 : 시애틀코리안데일리(http://www.seattlek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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