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주 한인 그로서리 업계가 잇따른 강력 범죄와 보험료 폭등, 비시민권자 배제 등 SBA 융자 자격 강화 문제로 벼랑 끝에 몰리자, 직접 연방·주 정부 인사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워싱턴주 한인그로서리협회(KAGRO of Washington State, 회장 김동백)는 4월 27일 페더럴웨이 협회 사무실에서 ‘한인 그로서리 업계 현안 정책 간담회’를 열고, 워싱턴주와 연방정부, 그리고 주류사회 관련 단체 대표들과 2시간에 걸쳐 심도 있는 의견을 교환했다.
이 자리에는 KAGRO 측에서 김윤정 사무총장(김동백 회장 대리), 남궁명 부이사장, 김인혁 전 회장, 그리고 제이슨 문 머킬티오 시의회 의장, 코리 한 워싱턴주 범죄예방협회(WSCPA) 재무이사, 필리핀계 사업가 조네일 스마파나씨가 참석했다. 외부 인사로는 태미 헤트릭 워싱턴 식품산업협회(WFIA) 회장, 마크 솔로몬 워싱턴주 범죄예방협회 회장, 켈리 챔버스 미 중소기업청(SBA) 지역행정관(워싱턴·아이다호·알래스카·오리건 4개 주 총괄)이 동석했다.
KAGRO 측은 모두발언에서 최근 잇따른 강력 범죄 사례를 거론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 지난주 파크 애비뉴 마켓의 진 사장이 총격을 당해 두 차례 수술을 받은 뒤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이라는 사실, 그리고 수년 전 타코마 인근에서 강도의 총격으로 숨진 찰리 박 사장, 데모인즈 소재 가게에서 시간제로 일하던 중 절도범과 충돌한 뒤 주차장에서 차량으로 보복당해 숨진 한인 이시복 목사의 사례가 거론됐다.
KAGRO 관계자는 “팬데믹 이후 회원 가게 가운데 약 50곳이 유리창 파손, 차량 돌진, ATM 강탈, 무장강도 등 심각한 범죄 피해를 신고했다”며 “2023년에는 한 회원이 권총 강도로 사망했고, 워싱턴주 인구의 1.2%에 불과한 한인 사회에 이 같은 사건이 통계 이상으로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호소했다. 협회 측은 또 “회원 200명이 활동하는 카카오톡 단체방을 통해 매일 피해 사례를 공유하고 자료를 축적해 왔지만, 정작 이를 정책으로 풀어낼 자원과 펀드는 없었다”고 토로했다.
마크 솔로몬 회장은 시애틀 경찰청 범죄예방 코디네이터이자 워싱턴주 범죄예방협회장으로서, ‘환경설계를 통한 범죄예방(CPTED·셉테드)’을 직접 소개했다. 그는 “편의점·그로서리는 진열창에 광고 포스터가 가득해 안팎이 서로 보이지 않고, 카운터 시야도 막혀 있는 경우가 많다”며 “출입 통제, 시야 확보, 영역성 강화, 유지·관리, 사회적 관리 등 다섯 요소를 점검해 사건을 ‘일어나기 전에’ 줄이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솔로몬 회장은 또 시애틀시가 이미 운영 중인 두 가지 지원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하나는 차량 충돌이나 강도로 파손된 매장의 수리비를 최대 3천 달러까지 사후 환급해 주는 ‘스토어 펌프 리페어’ 프로그램이고, 다른 하나는 조명·잠금장치·창문 보안필름·간판 등 사전 보안투자에 대해 최대 6천 달러까지 환급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단, 두 프로그램 모두 셉테드 자격을 갖춘 전문가의 사전 컨설팅을 받아야 신청할 수 있다.
다만 그는 “많은 영세 업주가 수리비를 먼저 지출할 현금조차 부족하다”며 “업주가 보안 투자에 들어갈 자금을 단기 대출(브리지론)로 융통하고, 이를 시 경제개발국이 사후에 갚아 주는 방식의 새 프로그램을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제이슨 문 머킬티오 시 의장은 “벨뷰, 켄모어, 켄트, 머킬티오, 벨링햄 등에서 남미계 범죄조직이 GPS 추적기와 카메라 등 첨단 기기를 동원해 아시아계 업주들의 ‘집’까지 노리고 있다”며 “지난 4개월간 머킬티오에서만 6건의 침입이 발생했고, 골프장을 통과해 접근하는 등 수법이 정교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FBI와 지역 경찰이 무료 차량 점검 캠페인을 벌이고 있지만, 범죄에 이용하는 GPS 추적기가 점차 자체 제작 단계로 진화해 시각 점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 “시민권자 아니라고 SBA 융자 끊겼다”… 폭탄 돌리기 우려
이날 간담회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SBA(중소기업청) 융자 자격 변경 문제였다. KAGRO 측은 “회원의 약 50%가 시민권이 아닌 영주권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3월 1일부로 SBA가 비시민권자에 대한 융자를 중단했다”며 “일부 소수민족계 은행은 포트폴리오의 30~70%가 비시민권자 SBA 융자라 6개월 안에 만기가 돌아오는 200만~300만 달러 규모 융자를 어떻게 갚을지 막막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KAGRO 측은 “이대로라면 영주권 업주들이 결국 30~70%대의 고금리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 시장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며 “일부 사모펀드와 은행이 빈틈을 메우는 상품을 내놓고 있지만, 까다로운 조건 탓에 영세 사업자에게는 그림의 떡”이라고 지적했다.
켈리 챔버스 SBA 지역행정관(백악관 임명)은 “이 자리에 와 보기 전까지는 한인 소상공인들이 처한 이런 구조적 위기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며 “오늘 간담회 내용을 백악관과 연방 상무부에 직접 전달하고, 정책 개선의 계기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챔버스 행정관은 동시에 SBA가 추진 중인 ‘식료품 보증 확대 프로그램(Grocery Guarantee)’도 소개했다. 농업, 식품 생산, 유통, 물류, 그로서리 소매 등 식품 공급망 전반에 대해 SBA가 기존 75%에서 90%까지 융자보증 비율을 상향한 제도다. 그는 “보안 강화를 위한 5만 달러 이하의 마이크로 융자 제도와, 지난해 12월 기상이변으로 피해를 입은 5개 카운티(킹카운티 인접 포함)를 대상으로 한 재해 융자도 활용 가능하다”며 “경제적 피해 융자 신청은 11월 말까지 가능하다”고 안내했다.
태미 헤트릭 WFIA 회장은 25년간 워싱턴 소매업협회(Retail Association)에서 일하며 ‘조직범죄 대응 태스크포스’ 활동을 한 경험을 소개하면서, “KAGRO와 WFIA가 같은 문제로 같은 자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며 “산재보험(Workers’ Comp) 운영 단체로서 안전·손실예방 교육에 활용 가능한 그랜트(grant) 자금이 상당하다”고 알렸다. 헤트릭 회장은 “마크 솔로몬 회장과 협력해 다국어로 번역된 안전·손실예방 교육 프로그램을 공동 개발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업주들이 호소한 또 다른 핵심 현안은 ‘보험료 폭등’이었다. 한 참석자는 “회원사들이 가장 많이 요청한 것이 보험 관련 자료다. 재산보험, 책임보험, 건강보험까지 모두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챔버스 행정관과 헤트릭 회장은 “셉테드 인증을 받은 매장에 대해 보험사가 보험료 인하를 검토하도록 협의해 볼 가치가 있다”고 호응했다.
회의에서는 ‘신고 장벽’도 비중 있게 다뤄졌다. “시애틀 경찰은 출동이 어렵더라도 모든 사건을 신고해 데이터로 누적해 달라고 강조하지만, 한인 업주들은 일선에서 신고를 잘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KAGRO 측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3개월 간격으로 신고 기록이 쌓이면 가게를 매도할 때 가치 평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우려”이고, 둘째는 “언어 장벽”이다. 한 참석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들어 “학교 수업 중에 ‘영어 못하는 어머니의 경찰 신고를 통역해 달라’는 호출을 받곤 했다. 자녀가 통역을 두세 번 거부하면 결국 부모는 도난을 신고도 못한 채 보험 처리에 의존하게 되고, 보험료는 또 폭등한다”고 토로했다.
이에 솔로몬 회장은 “시애틀 경찰을 비롯한 일선 경찰서는 76개 언어 통역 서비스를 수 분 안에 연결할 수 있다”며 “‘영어를 못하면 안 된다’는 인식 자체가 신고를 막는 가장 큰 원인이고, 이를 알리는 교육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KAGRO 사무실에 비상이 아닌 사건 접수와 보고서 작성을 도와줄 파트타임 인력을 두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고 제안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자료 번역·교육 콘텐츠 제작도 의제로 떠올랐다. 한 참석자는 “과거 한 자료를 다국어로 번역하는 데 두세 달이 걸렸지만, 이제는 AI를 활용해 영상까지 빠르게 만들 수 있다”며 “관 주도 캠페인을 한인·아시안 커뮤니티 맞춤으로 효율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적극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KAGRO 측은 회의 마무리 발언에서 “이번 간담회를 일회성 이벤트로 끝내지 않고 지속적인 follow-up을 통해 주류사회와의 연대를 강화하겠다”며 “단순한 사업환경 개선을 넘어 실질적인 정책 변화를 이끌어내는 단계까지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KAGRO 측은 특히 “WFIA, 워싱턴 범죄예방협회, 인도계 사업자 단체 등과 같은 목소리를 모아 올림피아 주의회에 한목소리로 청원하고, 평소 가까운 사이인 살로미아 주상원의원, 보브 하사가와 주상원의원 등을 통해 주 정부 차원의 안전·재정 지원 시스템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KAGRO는 회원 700여 명, 그중 200여 명이 카카오톡 단체방에서 매일 활발히 정보를 교환하고 있어, 한인뿐 아니라 인도계 등 다른 아시아계 자영업자 커뮤니티의 ‘소통 허브’ 역할까지 맡고 있다.
KAGRO 측은 또 “피해를 본 한인 업주에게 영어 통역과 경찰·보험사·시 자원 연계를 직접 지원하는 ‘1차 창구’ 역할을 협회가 맡고, 워싱턴 범죄예방협회·SBA·WFIA 등 주류사회 단체가 ‘2차 백업’을 맡는 모델’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업계는 이번 간담회가 한인 그로서리 업계가 주 정부와 연방정부, 주류 업계 단체와 ‘실질적 파트너십’을 처음으로 한 테이블에 모아 만든 자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KAGRO 관계자는 “리테일 크라임, 폭등하는 보험료와 인건비, 공급망 비용, SBA 융자 자격 강화 등 어느 하나도 한인 업계 혼자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오늘부터 시작된 협력의 틀이 한인뿐 아니라 워싱턴주 전체의 영세 자영업자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출처 : 시애틀코리안데일리(http://www.seattlekdaily.com)
[사진=김승규기자]









